BBC 출신인 로버트 해리스가 Fatherland(독일판 - Vaterland)에서 만들어낸 세계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2차대전에서 독일은 승리를 거두어 독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까지, 서쪽으로는 알자스 지방으로 확장되어 있으며 폴란드, 체코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없어져 모두 독일의 영토안에 포함되어 버렸고 기타 영국을 포함한 다른 서유럽의 나라들은 독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일종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1964년 히틀러가 75번째 생일을 맞이하려는 때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SS 소속의 경찰 강력계 수사관인 Xaver March(독일판에서는 Xaver Maerz)가 자살로 위장된 일렬의 살인사건을 조사하면서 그 뒤에 숨겨진 내막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로버트 해리스가 그려내는 가상의 세계는 제 3제국의 전체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암울한 곳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개인의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나치판 1984라고나 할까요? 여기에 전승기념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들이 들어선 가상의 베를린의 모습 또한 흥미롭게 하지만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중간에 미국인 여기자와의 로맨스가 긴장감을 좀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첫페이지부터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은 높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나름대로의 개연성을 가지도록 적당한 타협을 했습니다. 특히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가 전복되거나 하는 황당한 결말이 아닌 작은 희망정도만 암시하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실제의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실제 인물들의 발언을 직접 인용해놓은 부분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독일 역자는 나름대로의 설명을 책말미에 해놓았더군요. 덕분에 소설의 현실감이 더욱 살아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불만은 주인공인 Xaver March의 이름입니다.
독일어 판은 그래도 좀 나은 Xaver Maerz입니다만 원판의 이름이나 성은 도저히 독일적인 이름으로 들리지가 않아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Xaver라는 이름은 보통 Xaver Franz의 두 개의 이름을 합친 형태로 사용되고 March라는 독일 성은 거의 보기 힘듭니다. 차라리 독일판인 Maerz(영어판의 March(3월)을 해당되는 독일 단어로 바꾼)이 훨씬 독일적입니다.

하지만 전체주의적 시스템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밴드의 음악이라던지 상위층 인사로 갈수록 VW->BMW->Mercedes로 달라지는 승용차의 단계 같은 것은 재미있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