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요크셔 지방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 농부가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고, 발견 당시 그 옆에 있던 딸이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하고는 입을 닫습니다.
꽤나 까다로와 보이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야드(=런던 경시청)은 귀족 출신의 젊고 멋진, 그래서 플레이보이로 유명한 토마스 린리 형사와 그의 파트너로 하층 계급 출신이며 무뚝뚝하고 이런저런 컴플렉스가 심한 바바라 하버스를 현장으로 파견합니다. 평화로와 보였던 마을의 주민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고 수사 진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두 사람 개인의 문제까지 겹쳐 일은 점점 복잡해집니다...

성공적인 시리즈물의 첫번째 작품을 읽는 기분은 긴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설레임과 비슷합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불안함도 적지 않게 섞여 있죠. 하지만 다 읽고 났을 때 여행을 계속 해야겠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처음 가졌던 불안한 마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죠. 죠지 여사의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저는 넘치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여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마음이 설레입니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죠지는 미국인이지만 영국 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분으로 영문과 교수 출신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질적인 데뷔는 이 작품을 통해 뒤늦게 하게 되었죠. 사실 이 작품도 남편의 종용에 완성은 했지만 5년 후에 되어서야 출간을 했습니다. 비록 나오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녀는 이 작품으로 1988년 아가사 크리스티 어워드에서 올해의 신인작가 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이후 린리-하버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시리즈물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둡니다. (올해 신간이 발간될 예정이군요.)

이 작품이 반가웠던 이유는 그동안 좀 그리웠던 아가사 크리스티 풍의 고전적인 스타일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블록버스터를 연상케하는 긴장과 액션의 연속은 찾을 수 없고 느긋하고 호젓한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끔찍한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형태로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작가와 독자간의 두뇌싸움은 단 한번도 끊김없이 진행이 됩니다. 슬그머니 던지는 단서에 독자는 등장인물 모두를 한번씩은 용의자 선상에 올려보고 나름대로의 범행동기를 추리해 결국 스스로 사건을 해결했다고 굳게 믿지만 작가는 독자의 이러한 확신을 슬쩍 옆으로 비켜서면서 등장인물들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 작가가 처음부터 정성을 다해 꼼꼼하게 만들어 놓은 등장인물들의 모습 그 설정,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사건과는 별개로 흥미롭기까지 하죠. 제가 크게 실망했던 마사 그라임스의 정체불명의 주인공들의 밑도 끝도 없는 수다의 향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죠지 여사가 창조한 토마스 린리와 바바라 하버스는 정말 흥미로운 조합의 주인공들입니다. 이 둘은 너무도 상반된 배경과 성격을 가졌고 그때문에 적지않은 긴장이 둘 사이에 흐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인 주인공들입니다. 이 두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그려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느라 좀 느슨해 보이는 초반부과 여러가지 추리와 등장인물들끼리의 갈등이 난무하는 중반부를 지나 등장하는 후반부의 격렬한 절정은 독자를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까지 몰고갑니다. 전 책을 잡은 손을 벌벌 떨면서 마지막까지 읽었더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국과 영문학을 사랑했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영국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전형적인 영국 풍경과 영국인들의 모습을 잘 살려내었고 작가 스스로가 영문학자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수많은 영국문학에 대한 인용은 - 비록 그것이 브론테와 오스턴과 세익스피어에 한했다 하더라도 말이죠. - 그녀의 남다른 영국사랑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번역본이 아닌 원작으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인(뿐 아니라 유럽인이라고 해도 무방할)의 시각으로 보는 미국인에 대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제는 거의 클리쉐에 가까울 지 몰라도 유럽인들에게 미국인의 이미지는 예의 없고 무식하며 쓸데없는 자신감에 충만한 얄팍한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이런 모습을 미국인 작가 스스로가 보여준다는 것은 재미있더군요.

이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는 거의 금기시되는 것임에도 그 주제를 다루는 작가의 대단한 역량 덕분에 단순히 도덕적인 판결을 넘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에 이르는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줍니다. 더이상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하겠습니다만 꽤나 끔찍한 반전(일까요?)이라는 것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너무도 인간적인 두 주인공 수사관들입니다. 이들은 이 작품속의 사건을 통해 나름대로 '성장'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끔직한 사건을 파헤치면서 어떻게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지가 더 불가능해 보이지만 보통의 '탐정'들은 스스로 변하지는 않고 단지 인간의 이중성과 잔혹함에 허무함을 곱씹는 인물들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나 린리/하버스 두 사람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얻어진 '경험'과 이들이 직면한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나름대로 변해 갑니다. 그리고 이들과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더 변화하고 발전하게 될 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단지 저만 그런 것이 아니겠죠.

앞으로 이분의 작품을 더 읽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말이죠.
아쉽게도 한국에는 번역 출간이 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미 The Inspector Lynley Mysteries 라는 제목으로 Nathaniel Parker와 Sharon Small이 등장하는 TV 시리즈물이 BBC에서 제작 방영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죠지 여사의 작품 목록입니다. (독일 위키에서 가져왔습니다)

- 1988 A Great Deliverance
       .Gott schütze dieses Haus,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89

- 1989 Payment in Blood
       .Keiner werfe den ersten Stein,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1

- 1990 Well-Schooled in Murder
       .Auf Ehre und Gewisse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0

- 1991 A Suitable Vengeance
       .Mein ist die Rache,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Goldmann 1994 (zwar nicht der erste, aber im Handlungsstrang der Lynley-Welt der früheste Roman)

- 1992 For the Sake of Elena
       .Denn bitter ist der Tod,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 1994 Missing Joseph
       .Denn keiner ist ohne Schuld,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4

- 1995 Playing for the Ashes
       .Asche zu Asche,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5

- 1996 In the Presence of the Enemy
       .Im Angesicht des Feindes,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6

- 1997 Deception on his Mind
       .Denn sie betrügt man nicht,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7

- 1999 In Pursuit of the Proper Sinner
       .Undank ist der Väter Lohn,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1999

- 1999 The Evidence Exposed (Kurzgeschichten)

- 2001 A Traitor to Memory
       .Nie sollst du vergessen,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2001

- 2002 I, Richard (Fünf Kurzgeschichten)
       .Vergiss nie, dass ich dich liebe,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2002

- 2003 A Place of Hiding
       .Wer die Wahrheit sucht, dt. von Mechtild Sandberg-Ciletti, München: Blanvalet 2004

- 2004 Write Away. One Novelist´s Approach to Fiction and the Writing Life (Essays)
       .Wort für Wort oder Die Kunst, ein gutes Buch zu schreiben, dt. von Elke Hosfeld, München: Goldmann 2004

- 2004 A Moment on the Edge (Kurzgeschichten)

- 2005 With No One As Witness
       .Wo kein Zeuge ist, dt. von Ingrid Krane-Müschen und Michael J. Müschen, München: Blanvalet 2006

- 2006 What Came Before He Shot Her
       .Am Ende war die Tat, dt. von Ingrid Krane-Müschen und Michael J. Müschen, München: Blanvalet 2007

- 2008 Careless in 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