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경기를 가지지 않다보니 '현존 최고의 종합 격투기 선수'의 명성이 조금씩 바래기 시작한 표도르가 오랜만에 경기를 가졌습니다. 물론 그동안 Pride의 몰락, UFC로의 이적 문제, 새로운 격투기 단체들과의 어려움 등으로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리저리 방황했어야 했습니다만 이런 공백 덕분에 수많은 키보드 워리어들이 그의 능력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졌더랬죠. 표도르의 능력에 대해 한치의 의심이 없는 저마저도 혹시 부상 같은 것을 입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새로 들어간 격투 단체에서 처음으로 가진 경기의 상대가 다름 아닌 팀 실비아 라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습니다. 팀 실비아라면 UFC 팬들 뿐 아니라 종합 격투기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탑클래스의 선수이죠. 두 차례나 UFC 헤비급 챔피언이었고 수많은 UFC의 강자들과 격전을 벌였던 강자입니다. 큰 신장에서 기인하는 긴 리치를 이용한 파괴력 높은 타격이 장점으로 스스로 복서와 복싱으로 대결해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선수이기도 하죠. 표도르보다 거의 20센티가 크고 체중 차이도 많이 나는데다가 비슷한(?) 신체조건을 지녔던 표도르의 최근 상대인 최홍만과는 달리 격투가로서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상대이기에 모두가 경기 전부터 격렬한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표도르가 짧지만 굵은 타격전으로 시작해 36초만에 리어 네이키드 쵸크로 실비아의 탭을 받아냈습니다. ㅠ.ㅠ
공이 울리지마자 보여준 실비아의 자세는 표도르의 지난 경기들을 충분히 분석했음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스탠딩 자세에서 절대적으로 표도르의 왼손 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분석해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른손 가드를 많이 올려 철저하게 표도르의 왼손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표도르는 기본 자세에서 볼 수 있다시피 오른손잡이입니다만 실제 경기에서 결정적인 펀치는 거의 언제나 왼손이었습니다. 펀치력도 펀치력이지만 무엇보다 예상할 수 없는 각도에서 빠르게 날아온다는 것이 특징이자 장점이죠. 이런 강력한 왼손은 같은 앞에 서는 오른손잡이 선수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공격하려고 조금이라도 오른손을 뻗어 빈 틈을 보여줬다가는 바로 왼손훅을 얻어맞을테니까요.
어쨌거나 실비아는 긴 리치를 이용한 왼손 잽을 툭툭 던지며 천천히 다가갑니다. 그러나 이순간 이후부터 실비아는 판단 미스와 실수를 연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상대가 충분히 사정거리에 다가오자 표도르는 스탭의 속도를 줄이며 양 손으로 거의 장난에 가까워 보이는 특유의 가벼운 페이크들을 넣습니다. 이 페이크에 실비아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오른손으로 스트레이트를 던지려는 제대로 된 페이크를 시도합니다. 바로 직전 작은 페이크에 속지 않았던 실비아는 이번 페이크에는 제대로 속아 넘어갑니다. 이 스트레이트 펀치를 피하려고 얼굴을 살짝 오른쪽으로 틀었고 가드 밖으로 빠져나오는 실비아의 얼굴이 보이자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표도르의 왼손 훅이 작렬합니다.
이 펀치의 위력과 효과는 이번 경기에서 가장 결정적이었습니다. 실비아는 이때 사이드 스탭을 밟으며 왼쪽으로 피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뒤로 한발 물러났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며 피하는 방법도 있었겠죠. 어쨌거나 일단은 시간을 벌면서 받은 충격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비아는 클린치를 시도합니다. 썩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만약 클린치를 시도하려 했다면 복싱에서처럼 표도르의 몸을 제대로 안고 팔을 제압해 상대의 펀치를 무력화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무에타이식의 클린치를 해서 무릎 공격의 기회를 엿보려 했습니다. 물론 제대로 클린치를 했다 하더라도 클린치 상태의 제왕인 표도르에게 테이크 다운을 당할 위험이 상당히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제대로 맞은 펀치의 충격을 극복하는 쪽이 더 급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무모하기만 한 공격적인 무에타이 클린치를 시도한 것은 실수중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표도르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오른손으로 실비아의 머리쪽을 잡고 오히려 왼손 어퍼컷을 제대로 넣어 실비아의 판단 능력을 더 무너뜨립니다.
왼손 어퍼컷-왼손 훅이 연속으로 제대로 꽂히자 실비아는 어떻게 방어해야 할 지 판단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짧은 순간동안 가드가 완전히 열린 무방비 상태로 일련의 펀치를 정통으로 맞습니다. 오른손 훅-왼손 훅-다시 오른손 훅으로 이어지는 연타는 하나하나가 결정타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펀치는 너무도 정확하게 관자놀이부근을 때려 그 충격으로 실비아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쌉니다. 그리고 링 바닥으로 쓰러집니다. 그 와중에도 서너대의 펀치를 맞습니다만 그리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을 껍니다.
일단 그라운드 상황으로 넘어가자 표도르의 특기가 나옵니다. 앞으로 웅크린채 바닥에 엎드린 상태의 실비아에게 머리 뒤쪽에서 날려 옆얼굴을 겨냥하는 파운딩 펀치를 날려 상대가 제대로 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실비아는 몸을 굴려 상대의 공격을 벗어나려 시도하지만 실비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일련의 파운딩 펀치는 어떤 식으로 방어해야 할 지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게다가 실비아는 그래플링에 강한 선수도 아니죠. 결국 실비아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 상태가 되자 표도르는 그의 등위로 올라타 리어 네이키드 쵸크를 시도합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실비아는 표도르의 물흐르듯 유연하면서도 빠른 연속 공격에 설사 표도르의 의도를 읽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시간을 전혀 가지지 못합니다. 게다가 표도르는 이전 격투가들과의 시합에서 범했던 실수들에서 충분히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여지더군요. 즉, 헌트, 최홍만과의 경기에서 완벽하지 않은 기술을 걸었다가 역습을 당한 실수를 더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양 다리로 실비아의 하체를 먼저 완전히 제압하고 쵸크를 겁니다. 그리고 거의 힘들이지 않고 실비아의 탭을 받아내죠.
실비아의 실수는 우선 표도르의 핸드 스피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비아는 충분히 표도르의 타격 능력을 분석하고 이에 대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문제는 표도르가 이제까지 상대했던 선수들과는 다른 차원의 선수라는 것이겠죠. 짧은 거리에서도 폭발적인 스피드와 정확도를 겸비한 펀치력, 여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연하게 이어지는 연속 공격력은 실제로 상대하기 전까지는 예상하기 힘든 부분일테니까요.
그리고 다음은 클린치 시도에서의 실수입니다. 실비아는 이때 표도르의 겨드랑이를 제대로 껴안으며 펀치를 피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클린치에 성공했어도 바로 테이크 다운을 당해 그라운드 상태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만 그래도 적어도 회복을 위한 짧은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하지만 결국에는 표도르의 압도적인 기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은 빈 틈을 놓치지 않는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상대에게 생각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연속 공격은 역시 표도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이제 그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가질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그의 상대가 누가 될 것인지, 또 어떤 경기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서 수많은 추측과 예상을 하게 될 것 같군요. 저는 만약 표도르의 다음 상대가 바넷이 된다면 보기 드문 명승부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표도르에게 적어도 제대로 된 경기를 해볼 수 있는 선수는 레슬링을 베이스로 한 선수만이 가능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클린치 상태에서도 밀리지 않고 그래플링 상태에서 타격전으로의 전환이 빠르며 맷집이 좋은 선수만이 표도르를 길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조건에 잘 맞는 선수가 바넷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쨌거나 앞으로 표도르의 경기를 다시 한번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