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늘 보는 VfB Stuttgart의 포럼에서 퍼왔습니다.
번역을 해놓고 보니 좀 어색하지만 팬으로서 가지는 심정을 잘 대변하는 것 같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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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was länger zu lesen, aber wunderbar! Danke an "Distel" aus´m FC Kölle-Forum!
읽기에 조금 길 수도 있겠지만 멋진 글입니다. (이 글을 쓴) FC 쾰른 포럼의 'Distel'에게 감사를!
90년대 중반 나는 잉글랜드의 켄트 지방에 위치한 시팅본의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 폴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시팅본은 정말 볼 것 없는 시골이었지만 정확히 도버와 런던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운송회사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모든 화물이 언젠가는 그동네를 지나가야 하고 그 언젠가에 나도 물류창고를 찾아 그곳을 지나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사업에 있어 점점 좋은 관계로 발전했는데 내가 그곳을 방문했던 어느날 그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그날은 맛은 별로였던던 어느 이탈리아 식당에서 키안티 와인과 라거 맥주를 많이 마신 괜찮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폴이 입스위치 출신이며 - 시팅본만큼 볼 것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입스위치는 적어도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 태어날 때부터 입스위치 타운의 서포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둘 모두가 1981년 뮝거스도르프(FC 쾰른의 예전 경기장)에서의 (쾰른대 입스위치의) 0:1의 경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몇년 전부터 시즌권을 가지고 있으며 블루스(=입스위치 타운)의 런던에서의 모든 경기를 보러 다니고 있었다. 1981년은 그에게 첫번째 대륙에서의 어웨이 경기였다.("My first European away game!") 그리고 우리 두사람 서로의 클럽이 수많은 실망스러운 희망과 쓰디 쓴 실패에 대해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함께 눈물을 흘리는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FC 쾰른은 또다시 강등 위기에 있었고, 입스위치는 그때 막 강등되어 있었다. 우리는 두 클럽 모두가 근본적인 것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당분간동안은 언제나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리고 런던 근교의 어느 볼 것없는 공업도시에서의 어느 목요일 저녁, 함께 맥주와 멜랑콜리한 의심에 젖으니 멋진 이야기를 듣는데 아주 알맞는 분위기가 되었다.
폴은 내게 포트만 로드에서의 수많은 비내리는 오후에 삭막한 경기장에서 자신의 클럽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여러 돈만 밝히는 용병들과 커다란 의심에 사로잡힌 침묵하는 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몇번이고 잠시동안 승리에의 희망에 빠졌지만 언제나 찾아오는 패배 혹은 새로운 연패행진에 끔찍하게 낙심해왔다.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은) 나는 이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맥주에서 위스키로 바꿨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찰톤 애슬릭스와의 홈경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왜 이 모든 고난을 수년 전부터 감내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경기는 전반기에 있었고 (자주 그렇듯이) 비가 내리는 9월의 오후에 열렸다. 전반전까지 양팀 모두 무진장 나쁜 경기를 보여줬다. 휴식시간이 끝났지만 0:0의 스코어는 변하지 않았고 경기 또한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양 팀 모두 승격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팀 모두 끔찍한 킥 앤 러쉬의 플레이만 하고 있었다. 골찬스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있다 해도 우연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와야 할 것이 오고 말았다. 찰톤은 후반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상황에서 3:0을 만들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희망은 바닥에 떨어졌다. 비는 이제 끊이지 않고 계속 내렸다. 그리고 추워졌다. 정면 관람석에서 야유하는 휘파람 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그 때는 어느 누구나 그냥 경기장을 나와 가까이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아무 독주나 연속으로 들이키는 것만을 원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찰튼이 4번째 골을 넣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폴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게 만드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났다. 줄마다 블록마다 관중들이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우리는 노래를 불렀어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단 한명의 예외없이. 믿기지도 않고 전혀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 소리는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60분 무렵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관중들은 "The Pride of Anglia"와 "Ipswich Till I Die"를 한도 끝도 없이 번갈아 가며 반복해 계속 불렀다. 모두가 예외 없이 그리고 자신들 눈앞의 경기와 팀의 끔찍한 경기력은 무시한채 노래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찰톤의 주장이 (찰톤은 입스위치 타운과 어떤 각별한 인연있는 팀이 아니다) 코너킥을 할 때 입스위치 팬들에게 돌아서서 인사를 하고 박수를 치는데까지 이르렀다. 노래 소리는 더욱 커졌고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경기는 1:5로 졌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그 순간 모두에게 여기에 더이상 (눈앞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이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와 우리 클럽에 대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강등 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엉망인 경기 후 매번 클럽 경영진의 사탕발림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기도 했죠. 물론 우리는 다시 승격할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길 원했지만 현실 또한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저기 밑에는 짜집기해 맞춘 용병들이 우리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서 산책이나 하면서 우리의 명예를 빼앗아가고 있었어요.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가 사랑하는 팀의 핏줄에 흐르는 피가 우리라는 것을 말이죠. 우리는 분명히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입스위치 타운이고 너희 거지같은 것들이 개같은 플레이로 경기를 말아먹어도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요. 우리는 너희들이 캐리어를 망친 이후 술집에서 울면서 있을 때에도 여기에 서서 우리 클럽을 응원할 것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아마도 골문 뒤의 광팬들만이 아닌 경기장의 모두가 함께 일어났을 겁니다. 그건 완전한 단결이었고 완벽한 자각이었으며 메시지였죠.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이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서포팅을 할 것이며 설사 이 개xx들이 벌써 죽은 시체인양 굴어도 입스위치 타운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요."
우리는 그리고도 한동안 함께 앉아 우리의 팬으로의 운명에 대한 자부심, 우울함 그리고 의심이 멋지게 섞인 순간을 음미했다. 주인이 의자를 식탁위에 올려놓을 때가 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수풀 속에서 한번 크게 토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까지 술이 취해 있었고 그 이후로는 내 기억으로 가장 끔찍했던 숙취로 고생을 해야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열정과 화술의 경지에 오른 진정한 고통의 동지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기장과 클럽 경영에 있는 x신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그들이 말하는 것이나 그들이 얼마나 나쁘게 혹은 멋지게 경기했는지에 대해서 걱정했었죠. 우리는 그저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타협없는 클럽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껍니다. 우리는 그들이 앞으로 절대 가질 수 없는 자부심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벌써 이제 7, 8년 전의 이야기이다. 아쉽게도 이제는 더이상 폴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회사를 옮겼고 그리고는 그 역시 회사를 옮기면서 서로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인생에 늘 있는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는 꽤나 오랫동안 이 인상적인 저녁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지난 수요일 그러니까 대략 오후 4시 15분쯤까지 말이다. 뮝거스도르프에서 전반이 끝나면서 사람들이 줄지어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그때말이다. 그때 나는 여기가 춥고 비가 내리는 입스위치의 포트만 로드에서의 오후이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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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입니다.
Mitte der Neunziger hatte ich einen Kollegen namens Paul, dessen Firma Ihren Sitz in Sittingbourne, Kent in England hatte. Ein unglaublich hässlicher Flecken, aber genau zwischen Dover und London, und deshalb für einen Spediteur keine schlechte Wahl. Da kommen alle Frächter irgendwann vorbei und so eines Tages auch ich, auf der Suche nach einem Lagerhalter.
Im Laufe der Zeit kamen wir immer besser miteinander ins Geschäft, so dass er mich eines Tages zum Essen einlud, als ich wieder mal zu Besuch war. Es war ein netter Abend bei einem schlechten Italiener mit viel Chianti und Lager. So erfuhr ich dann, dass er aus Ipswich stammte (was in etwa so hässlich ist wie Sittingbourne, nur das Ipswich wenigstens am Meer liegt) und ein eingefleischter Supporter von Ipswich Town war.
Das war natürlich ein toller Aufhänger, wir stellten fest, dass wir beide 1981 beim 0:1 in Müngersdorf waren. Er hatte seit Jahren eine Dauerkarte und fuhr auch zu allen Londoner Matches der Blues. 1981 war sein erstes Auswärtsspiel auf dem Kontinent ("My first European away game!"). Es hat natürlich nicht lange gedauert, bis wir die vielen Parallelen unserer Klubs beweint haben, die zahlreichen enttäuschten Hoffnungen und bitteren Pleiten. Der FC stand mal wieder kurz vor dem Abstieg, Ipswich war gerade mal wieder abgestiegen. Wir waren uns einig, dass unsere beiden Vereine auf absehbare Zeit ein ähnliches Dasein fristen würden, wenn sich nichts Grundlegendes ändere.
Und wie das so ist, in gemeinsamer bierseelig-melancholischer Verzweiflung an einem Donnerstag Abend in einem hässlichen Loch von Industriestädtchen vor den Toren Londons: man kriegt die richtig guten Geschichten erzählt.
Paul erzählte mir von den vielen verregneten Nachmittagen an der Portman Road, dem grausamen Gebolze der diversen Söldnertruppen im Trikot seines Klubs, der stummen aber auch zuweilen lauten Verzweiflung der Fans. Der immer wieder kurz aufflackerrnden Hoffnung bei einem Sieg, der elenden Ernüchterung bei der darauf folgenden Niederlage bzw. neuen Niederlagenserie. Ich konnte ihm das alles mehr als gut nachfühlen. Wir gingen von Bier auf Whisky über.
Irgendwann kam er auf ein Heimspiel gegen Charlton Athletic zu sprechen, bei dem ihm zum ersten Mal deutlich wurde, warum und weshalb er sich das alles eigentlich seit Jahren antut. Es war ein Spiel der Hinrunde, es war ein (wie so häufig) verregneter September-Nachmittag und eine grottenschlechte erste Halbzeit beider Teams. Demnach stand es zur Pause auch 0:0 und eigentlich war auch keine wesentliche Besserung in Sicht. Die Stimmung war indifferent trübe, weder in die eine noch die andere Richtung. Beide Teams hatten Aufstiegshoffnungen, spielten aber einen fürchterlichen Kick and Rush. Torchancen gab es so gut wie keine und wenn, dann waren es Zufallsprodukte.
Und dann kam, was kommen musste. Charlton ging nach der Pause wie aus dem nichts mit 3:0 in Führung. Alle Hoffnungen waren am Boden. Dauerregen setzte ein. Es war kalt. Ein gellendes Pfeifkonzert von der Haupttribüne setzte ein. Es war der Moment, in dem man eigentlich nur das Stadion verlassen möchte um in der nächstliegenden Kneipe in kurzer Abfolge soviel geistige Getränke wie nur irgend möglich in sich hineinzuschütten.
Eine Weile passierte gar nichts mehr. Dann schoss Charlton das vierte Tor. Und dann setzte etwas ein, was Paul beim Erzählen die Tränen in die Augen trieb. Reihe um Reihe, Block um Block erhoben sich die Zuschauer und fingen an zu singen.
"And all of a sudden, just out of nowhere, we sang. Everyone, on every seat, there was just no exception. It was incredible, totally unexplainable and overwhelmingly loud...".
Von der 60. Minute an bis zum Ende des Spiels sangen die Zuschauer in einer todesverachtenden Endlosschleife immer wieder abwechselnd "The Pride of Anglia" und "Ipswich Till I Die". Ohne jede Ausnahme und unter Missachtung des Spielverlaufs und der erbärmlichen Leistung der eigenen Mannschaft. Das führte soweit, dass der Spielführer von Charlton (die nicht unbedingt eine innige Beziehung zu Ipswich Town pflegen) sich bei einem Eckball zu den Ipswich-Fans umdrehte, einmal kurz salutierte und dann applaudierte. Worauf die Gesänge noch lauter wurden und bis zum Schlusspfiff nicht nachließen. Das Spiel ging 1:5 verloren, was aber niemanden mehr interessierte.
"Ich glaube, was uns allen in diesem Moment klar wurde, war, dass es hier nicht mehr um die Unterstützung der Mannschaft ging. Es ging um uns und unseren Verein. Wir hatten schon zu Beginn der Saison wenig Vertrauen in das, was da nach dem Abstieg übrig geblieben war. Außerdem ging uns das Management mit seiner Schönrederei selbst der beschissensten Spiele auf den Geist. Klar - wir hatten die Hoffnung wieder aufzusteigen, wir wollten das alle, aber wir sahen auch die Realität. Da stand ein Haufen zusammengewürfelter Söldner auf dem Platz, die unsere Trikots spazieren trugen und dabei waren, unsere Ehre zu stehlen. In dem Moment wollten wir allen nur noch zeigen, wer wir sind: das Blut in den Adern des Vereins, den wir lieben. Wir wollten klar machen: WIR sind Ipswich Town und ihr Würstchen könnt uns mit eurer Leistungsverweigerung nicht demütigen. Wir werden noch hier sein und unseren Mann stehen, wenn ihr längst in irgend einer Kneipe eurer verpassten Karriere hinterher weint. Deshalb stand vermutlich auch das ganze Stadion auf und machte mit, nicht nur die Hartgesottenen hinter dem Tor. Das war der totale Zusammenhalt, die vollständige Identifikation und Hingabe. WIR wussten: das ist es wert, deshalb machen wir das und Ipswich Town wird niemals sterben, selbst wenn diese kleinen *A A*er da unten so tun, als wären sie schon tot.".
Wir saßen noch eine ganze Weile zusammen und gaben uns dieser herrlichen Mischung aus Stolz, Melancholie und Verzweiflung über unser Fan-Schicksal hin. Erst als der Maitre anfing, die Stühle auf die Tische zu stellen, brachen wir auf. Ich brach dann auf dem Weg ins Hotel auch noch einmal kräftig in die Büsche. Am nächsten Tag war ich noch bis Mittags betrunken und danach setzte dann einer der fürchterlichsten Kater ein, an die ich mich erinnern kann. Aber es war die Sache wert. An diesem Abend habe ich einen echten Leidensgenossen erlebt, auf dem Höhepunkt seiner Leidenschaft und Erzählkunst.
"We knew, we had nothing in common with those little ****-heads on the pitch or in management. We were past caring what they said or how bad or well they played. We simply wanted to show our dedication, our uncompromising support for the club and that our story would never end. We wore our colours with a pride they would never live up to."
Das ist jetzt sieben oder acht Jahre her. Zu Paul habe ich leider keinen Kontakt mehr, erst habe ich die Firma gewechselt, dann er und inzwischen haben wir uns aus den Augen verloren. Wie es manchmal halt so geht im Leben. Und ehrlich gesagt, habe ich eine ganze Weile nicht mehr an diesen bemerkenswerten Abend gedacht.
Bis letzten Samstag, so ungefähr gegen 16.15 Uhr. Als in Müngersdorf die Leute in Scharen zur Halbzeit das Stadion verließen. Da habe ich mir gewünscht, es wäre ein kalter, verregneter Nachmittag an der Portman Road in Ipswich.
번역을 해놓고 보니 좀 어색하지만 팬으로서 가지는 심정을 잘 대변하는 것 같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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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was länger zu lesen, aber wunderbar! Danke an "Distel" aus´m FC Kölle-Forum!
읽기에 조금 길 수도 있겠지만 멋진 글입니다. (이 글을 쓴) FC 쾰른 포럼의 'Distel'에게 감사를!
90년대 중반 나는 잉글랜드의 켄트 지방에 위치한 시팅본의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 폴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시팅본은 정말 볼 것 없는 시골이었지만 정확히 도버와 런던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운송회사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모든 화물이 언젠가는 그동네를 지나가야 하고 그 언젠가에 나도 물류창고를 찾아 그곳을 지나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사업에 있어 점점 좋은 관계로 발전했는데 내가 그곳을 방문했던 어느날 그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그날은 맛은 별로였던던 어느 이탈리아 식당에서 키안티 와인과 라거 맥주를 많이 마신 괜찮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폴이 입스위치 출신이며 - 시팅본만큼 볼 것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입스위치는 적어도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 태어날 때부터 입스위치 타운의 서포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둘 모두가 1981년 뮝거스도르프(FC 쾰른의 예전 경기장)에서의 (쾰른대 입스위치의) 0:1의 경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몇년 전부터 시즌권을 가지고 있으며 블루스(=입스위치 타운)의 런던에서의 모든 경기를 보러 다니고 있었다. 1981년은 그에게 첫번째 대륙에서의 어웨이 경기였다.("My first European away game!") 그리고 우리 두사람 서로의 클럽이 수많은 실망스러운 희망과 쓰디 쓴 실패에 대해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함께 눈물을 흘리는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FC 쾰른은 또다시 강등 위기에 있었고, 입스위치는 그때 막 강등되어 있었다. 우리는 두 클럽 모두가 근본적인 것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당분간동안은 언제나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리고 런던 근교의 어느 볼 것없는 공업도시에서의 어느 목요일 저녁, 함께 맥주와 멜랑콜리한 의심에 젖으니 멋진 이야기를 듣는데 아주 알맞는 분위기가 되었다.
폴은 내게 포트만 로드에서의 수많은 비내리는 오후에 삭막한 경기장에서 자신의 클럽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여러 돈만 밝히는 용병들과 커다란 의심에 사로잡힌 침묵하는 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몇번이고 잠시동안 승리에의 희망에 빠졌지만 언제나 찾아오는 패배 혹은 새로운 연패행진에 끔찍하게 낙심해왔다.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은) 나는 이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맥주에서 위스키로 바꿨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찰톤 애슬릭스와의 홈경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왜 이 모든 고난을 수년 전부터 감내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경기는 전반기에 있었고 (자주 그렇듯이) 비가 내리는 9월의 오후에 열렸다. 전반전까지 양팀 모두 무진장 나쁜 경기를 보여줬다. 휴식시간이 끝났지만 0:0의 스코어는 변하지 않았고 경기 또한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양 팀 모두 승격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팀 모두 끔찍한 킥 앤 러쉬의 플레이만 하고 있었다. 골찬스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있다 해도 우연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와야 할 것이 오고 말았다. 찰톤은 후반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상황에서 3:0을 만들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희망은 바닥에 떨어졌다. 비는 이제 끊이지 않고 계속 내렸다. 그리고 추워졌다. 정면 관람석에서 야유하는 휘파람 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그 때는 어느 누구나 그냥 경기장을 나와 가까이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아무 독주나 연속으로 들이키는 것만을 원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찰튼이 4번째 골을 넣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폴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게 만드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났다. 줄마다 블록마다 관중들이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우리는 노래를 불렀어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단 한명의 예외없이. 믿기지도 않고 전혀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 소리는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60분 무렵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관중들은 "The Pride of Anglia"와 "Ipswich Till I Die"를 한도 끝도 없이 번갈아 가며 반복해 계속 불렀다. 모두가 예외 없이 그리고 자신들 눈앞의 경기와 팀의 끔찍한 경기력은 무시한채 노래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찰톤의 주장이 (찰톤은 입스위치 타운과 어떤 각별한 인연있는 팀이 아니다) 코너킥을 할 때 입스위치 팬들에게 돌아서서 인사를 하고 박수를 치는데까지 이르렀다. 노래 소리는 더욱 커졌고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경기는 1:5로 졌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그 순간 모두에게 여기에 더이상 (눈앞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이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와 우리 클럽에 대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강등 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엉망인 경기 후 매번 클럽 경영진의 사탕발림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기도 했죠. 물론 우리는 다시 승격할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길 원했지만 현실 또한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저기 밑에는 짜집기해 맞춘 용병들이 우리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서 산책이나 하면서 우리의 명예를 빼앗아가고 있었어요.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가 사랑하는 팀의 핏줄에 흐르는 피가 우리라는 것을 말이죠. 우리는 분명히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입스위치 타운이고 너희 거지같은 것들이 개같은 플레이로 경기를 말아먹어도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요. 우리는 너희들이 캐리어를 망친 이후 술집에서 울면서 있을 때에도 여기에 서서 우리 클럽을 응원할 것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아마도 골문 뒤의 광팬들만이 아닌 경기장의 모두가 함께 일어났을 겁니다. 그건 완전한 단결이었고 완벽한 자각이었으며 메시지였죠.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이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서포팅을 할 것이며 설사 이 개xx들이 벌써 죽은 시체인양 굴어도 입스위치 타운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요."
우리는 그리고도 한동안 함께 앉아 우리의 팬으로의 운명에 대한 자부심, 우울함 그리고 의심이 멋지게 섞인 순간을 음미했다. 주인이 의자를 식탁위에 올려놓을 때가 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수풀 속에서 한번 크게 토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까지 술이 취해 있었고 그 이후로는 내 기억으로 가장 끔찍했던 숙취로 고생을 해야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열정과 화술의 경지에 오른 진정한 고통의 동지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기장과 클럽 경영에 있는 x신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그들이 말하는 것이나 그들이 얼마나 나쁘게 혹은 멋지게 경기했는지에 대해서 걱정했었죠. 우리는 그저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타협없는 클럽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껍니다. 우리는 그들이 앞으로 절대 가질 수 없는 자부심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벌써 이제 7, 8년 전의 이야기이다. 아쉽게도 이제는 더이상 폴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회사를 옮겼고 그리고는 그 역시 회사를 옮기면서 서로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인생에 늘 있는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는 꽤나 오랫동안 이 인상적인 저녁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지난 수요일 그러니까 대략 오후 4시 15분쯤까지 말이다. 뮝거스도르프에서 전반이 끝나면서 사람들이 줄지어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그때말이다. 그때 나는 여기가 춥고 비가 내리는 입스위치의 포트만 로드에서의 오후이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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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입니다.
Mitte der Neunziger hatte ich einen Kollegen namens Paul, dessen Firma Ihren Sitz in Sittingbourne, Kent in England hatte. Ein unglaublich hässlicher Flecken, aber genau zwischen Dover und London, und deshalb für einen Spediteur keine schlechte Wahl. Da kommen alle Frächter irgendwann vorbei und so eines Tages auch ich, auf der Suche nach einem Lagerhalter.
Im Laufe der Zeit kamen wir immer besser miteinander ins Geschäft, so dass er mich eines Tages zum Essen einlud, als ich wieder mal zu Besuch war. Es war ein netter Abend bei einem schlechten Italiener mit viel Chianti und Lager. So erfuhr ich dann, dass er aus Ipswich stammte (was in etwa so hässlich ist wie Sittingbourne, nur das Ipswich wenigstens am Meer liegt) und ein eingefleischter Supporter von Ipswich Town war.
Das war natürlich ein toller Aufhänger, wir stellten fest, dass wir beide 1981 beim 0:1 in Müngersdorf waren. Er hatte seit Jahren eine Dauerkarte und fuhr auch zu allen Londoner Matches der Blues. 1981 war sein erstes Auswärtsspiel auf dem Kontinent ("My first European away game!"). Es hat natürlich nicht lange gedauert, bis wir die vielen Parallelen unserer Klubs beweint haben, die zahlreichen enttäuschten Hoffnungen und bitteren Pleiten. Der FC stand mal wieder kurz vor dem Abstieg, Ipswich war gerade mal wieder abgestiegen. Wir waren uns einig, dass unsere beiden Vereine auf absehbare Zeit ein ähnliches Dasein fristen würden, wenn sich nichts Grundlegendes ändere.
Und wie das so ist, in gemeinsamer bierseelig-melancholischer Verzweiflung an einem Donnerstag Abend in einem hässlichen Loch von Industriestädtchen vor den Toren Londons: man kriegt die richtig guten Geschichten erzählt.
Paul erzählte mir von den vielen verregneten Nachmittagen an der Portman Road, dem grausamen Gebolze der diversen Söldnertruppen im Trikot seines Klubs, der stummen aber auch zuweilen lauten Verzweiflung der Fans. Der immer wieder kurz aufflackerrnden Hoffnung bei einem Sieg, der elenden Ernüchterung bei der darauf folgenden Niederlage bzw. neuen Niederlagenserie. Ich konnte ihm das alles mehr als gut nachfühlen. Wir gingen von Bier auf Whisky über.
Irgendwann kam er auf ein Heimspiel gegen Charlton Athletic zu sprechen, bei dem ihm zum ersten Mal deutlich wurde, warum und weshalb er sich das alles eigentlich seit Jahren antut. Es war ein Spiel der Hinrunde, es war ein (wie so häufig) verregneter September-Nachmittag und eine grottenschlechte erste Halbzeit beider Teams. Demnach stand es zur Pause auch 0:0 und eigentlich war auch keine wesentliche Besserung in Sicht. Die Stimmung war indifferent trübe, weder in die eine noch die andere Richtung. Beide Teams hatten Aufstiegshoffnungen, spielten aber einen fürchterlichen Kick and Rush. Torchancen gab es so gut wie keine und wenn, dann waren es Zufallsprodukte.
Und dann kam, was kommen musste. Charlton ging nach der Pause wie aus dem nichts mit 3:0 in Führung. Alle Hoffnungen waren am Boden. Dauerregen setzte ein. Es war kalt. Ein gellendes Pfeifkonzert von der Haupttribüne setzte ein. Es war der Moment, in dem man eigentlich nur das Stadion verlassen möchte um in der nächstliegenden Kneipe in kurzer Abfolge soviel geistige Getränke wie nur irgend möglich in sich hineinzuschütten.
Eine Weile passierte gar nichts mehr. Dann schoss Charlton das vierte Tor. Und dann setzte etwas ein, was Paul beim Erzählen die Tränen in die Augen trieb. Reihe um Reihe, Block um Block erhoben sich die Zuschauer und fingen an zu singen.
"And all of a sudden, just out of nowhere, we sang. Everyone, on every seat, there was just no exception. It was incredible, totally unexplainable and overwhelmingly loud...".
Von der 60. Minute an bis zum Ende des Spiels sangen die Zuschauer in einer todesverachtenden Endlosschleife immer wieder abwechselnd "The Pride of Anglia" und "Ipswich Till I Die". Ohne jede Ausnahme und unter Missachtung des Spielverlaufs und der erbärmlichen Leistung der eigenen Mannschaft. Das führte soweit, dass der Spielführer von Charlton (die nicht unbedingt eine innige Beziehung zu Ipswich Town pflegen) sich bei einem Eckball zu den Ipswich-Fans umdrehte, einmal kurz salutierte und dann applaudierte. Worauf die Gesänge noch lauter wurden und bis zum Schlusspfiff nicht nachließen. Das Spiel ging 1:5 verloren, was aber niemanden mehr interessierte.
"Ich glaube, was uns allen in diesem Moment klar wurde, war, dass es hier nicht mehr um die Unterstützung der Mannschaft ging. Es ging um uns und unseren Verein. Wir hatten schon zu Beginn der Saison wenig Vertrauen in das, was da nach dem Abstieg übrig geblieben war. Außerdem ging uns das Management mit seiner Schönrederei selbst der beschissensten Spiele auf den Geist. Klar - wir hatten die Hoffnung wieder aufzusteigen, wir wollten das alle, aber wir sahen auch die Realität. Da stand ein Haufen zusammengewürfelter Söldner auf dem Platz, die unsere Trikots spazieren trugen und dabei waren, unsere Ehre zu stehlen. In dem Moment wollten wir allen nur noch zeigen, wer wir sind: das Blut in den Adern des Vereins, den wir lieben. Wir wollten klar machen: WIR sind Ipswich Town und ihr Würstchen könnt uns mit eurer Leistungsverweigerung nicht demütigen. Wir werden noch hier sein und unseren Mann stehen, wenn ihr längst in irgend einer Kneipe eurer verpassten Karriere hinterher weint. Deshalb stand vermutlich auch das ganze Stadion auf und machte mit, nicht nur die Hartgesottenen hinter dem Tor. Das war der totale Zusammenhalt, die vollständige Identifikation und Hingabe. WIR wussten: das ist es wert, deshalb machen wir das und Ipswich Town wird niemals sterben, selbst wenn diese kleinen *A A*er da unten so tun, als wären sie schon tot.".
Wir saßen noch eine ganze Weile zusammen und gaben uns dieser herrlichen Mischung aus Stolz, Melancholie und Verzweiflung über unser Fan-Schicksal hin. Erst als der Maitre anfing, die Stühle auf die Tische zu stellen, brachen wir auf. Ich brach dann auf dem Weg ins Hotel auch noch einmal kräftig in die Büsche. Am nächsten Tag war ich noch bis Mittags betrunken und danach setzte dann einer der fürchterlichsten Kater ein, an die ich mich erinnern kann. Aber es war die Sache wert. An diesem Abend habe ich einen echten Leidensgenossen erlebt, auf dem Höhepunkt seiner Leidenschaft und Erzählkunst.
"We knew, we had nothing in common with those little ****-heads on the pitch or in management. We were past caring what they said or how bad or well they played. We simply wanted to show our dedication, our uncompromising support for the club and that our story would never end. We wore our colours with a pride they would never live up to."
Das ist jetzt sieben oder acht Jahre her. Zu Paul habe ich leider keinen Kontakt mehr, erst habe ich die Firma gewechselt, dann er und inzwischen haben wir uns aus den Augen verloren. Wie es manchmal halt so geht im Leben. Und ehrlich gesagt, habe ich eine ganze Weile nicht mehr an diesen bemerkenswerten Abend gedacht.
Bis letzten Samstag, so ungefähr gegen 16.15 Uhr. Als in Müngersdorf die Leute in Scharen zur Halbzeit das Stadion verließen. Da habe ich mir gewünscht, es wäre ein kalter, verregneter Nachmittag an der Portman Road in Ipsw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