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몹시도 내리는 늦가을의 어느 밤, 술에 좀 취한 채 집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던 누군가가 그만 길가에 걸어가던 젊은이 하나를 치고 맙니다. 자동차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진동을 느끼고 급히 차를 세우고 밖에 나왔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 늦은 시간에 좋지 않은 날씨라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 그는 이 사고를 그냥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서 날아온 협박 편지를 받게 되면서 그는 혼란 속에 자제력을 잃어 버리기 시작합니다...... 경찰은 다름아닌 Van Veeteren의 아들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자 충격 속에서 범인을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합니다만 단서가 거의 없어 수사는 계속 미궁으로 빠져듭니다...

지난 연말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스웨덴 출신의 하칸 네서의 'Van Veeteren' 시리즈중 하나입니다. 예전에 읽은 작품은 조금 실망이었는데 이분의 작품에 대해서 워낙 많은 호평을 접했기에 속는 셈치고 한번 더의 심정으로 빌려와 읽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작품 내에 화자가 계속 변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감정 이입에 많은 할애를 하였고 덕분에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 대략 네덜란드 어딘가를 연상시키는 기후와 지명이긴 합니다만 - 북유럽 늦가을의 우중충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점점 변하는 살인자의 심리를 멋지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가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절박함과 충동, 그리고 살인을 저지를 후의 상태까지 쫓아가다 보면 무엇이 평범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드는가에 대해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합니다.
한편 작가는 경찰들의 수사와 이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설명을 해줍니다. 단서가 보이지 않은 살인사건에서 과연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 물론 독자들은 대략적인 범인의 동기를 알고 있습니다. - 작은 단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한편으로는 무식하게 끈기있는 경찰들의 모습은 실제 경찰들의 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게 되죠. 여기에 비록 내내 말썽을 부렸던 아들이지만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도 보여줍니다. 이 작품속에서 Van Veeteren은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수사관이기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지만 몇가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범인과 경찰의 관점을 번갈아 보면서 스스로 충분히 많은 단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절묘한 구성으로 결국 작품 후반부까지 독자들도 빠진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초반부가 약간 지루하긴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적당한 긴장감도 만들어지고 읽기에도 수월해집니다. 왜 하칸 네서가 헤닝 만켈과 더불어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작가로 추앙을 받는지 결국 알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원제인 Carambole는 당구의 일종인데 작품속에 자주 등장하는, 굴러가고 부딪치는 당구공과 인간의 운명을 비교한 이론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