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의 신 - Matt Le Tissier

Fussball 2009. 2. 27. 21:44 posted by srv
맷 르 티시어는 젊은 나이에 도버 해협의 작은 섬에서 건너와 FC 사우스햄튼의 아이콘이 되었다. 축구계는 "Le God"의 환상적인 골에 넉다운되었다. 이제 그도 한결같았던 그의 겉보기 나이만큼 늙어 버렸다. 그의 나이도 이제 마흔. 마흔번째 생일을 맞아(역자주: 이 기사는 작년에 나왔습니다.) 그의 축구 인생을 돌아본다.



키취로 가득 찬 TV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제작진조차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일이 벌어졌다. 2001년 5월 19일 FC 사우스햄튼은 홈구장인 »The Dell«에서 런던의 FC Arsenal과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는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러나 이는 잉글랜드에서 »Saints« 라 불리우는 사우스햄튼에게는 일상적인 프리미어 경기가 아니었다. 맷 르 티시어가 긴 부상의 공백 끝에 다시 출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후반전 중반 무렵 그는 교체 투입되기 위해 경기장 바깥에서 기다리며 서 있었다.
맷 르 티시어: 그와 같은 선수는 이 클럽의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도 한번도 볼 수 없었다. 그라운드의 아나키스트이자 그의 동료인 폴 게스코인과 같은 '천재' »a genius« 였으며 모두 그를 경탄에 가득 차 »le Tiss«라 불렀다. 그의 골들, 그것은 쾌락의 음미이며 그의 독창성과 마무리는 독보적이었다. »Saints«의 팬들은 2001년 5월 19일 90분의 경기가 끝나고 거의 완전한 '감정의 복받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린 소년들부터 황소같은 목덜미를 가진 대머리의 큰 덩치들까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눈물을 흘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커다란 코와 지나치게 큰 머리에 몸놀림은 뻣뻣하지만, 피치 위에서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한 행동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웃기는 사내는 누구인가? 이것은 영국의 전통적인 클럽인 FC 사우스햄튼의 팀관계자들조차 아무리 늦어도 1985년초 베일 레크리에이션 Vale Recreation과 »Saints«의 유스팀의 경기에서 어느 긴 다리의 젊은이가 홈팀에게 반다스 이상의 골을 넣으며 조롱했던 때 떠올렸던 질문이다. 그리고 이후 그에 대한 수많은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베일 Vale에서 주기적으로 코너킥을 직접 골로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마리오 바슬러를 - 그는 르 티시어와 동년배이다. -  떠올리게 된다.

오랜 무명의 시간

베일 레크레이션은 맷의 고향인 도버해협의 섬의 클럽이다. 그곳에서 매튜 폴 르 티시어 Matthew Paul le Tissier는 1968년 10월 14일 태어났다. 이 특이한 섬사람들은 브리튼섬의 사람들에게 수상하게 보였는지, 이들은 자신들의 국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역자 주: 즉, 영국이나 프랑스 국적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후 르 티시어는 이미 영국 축구에서 가장 유능한 공격수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고, 두 나라의 대표팀은 서로 그를 끌어들이려 노력을 했다. »Le Tiss«는 프랑스가 아닌 영국을 위해 뛰기로 결정했지만 덕분에 그는 수년동안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사우스햄튼은 이 다이아몬드 원석같은 선수를 건시 Guernsey 섬 - 역자주: 르 티시어의 고향.)에서 데려와 프로팀에 입단시킨다. 1986년 9월 2일 그는 데뷔전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 늦은 레이케스터와의 리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성공시키면서부터 팬들의 가슴속에서 함께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해트트릭도 그냥 해트트릭이 아니었다. 이날 피치는 눈으로 뒤덮여 전반적인 경기의 모습은 보통의 리그 경기라기 보다는 마치 'Stars on ice' 같은 아이스쇼를 연상시켰다. 오직 도버해협 섬출신의 젊은 선수만이 하얀 눈가루 사이를 우아하게 미끄러지며 흥분되는 세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4년 후 이 비쩍 마른 재능이 충만한 선수는 »Saints« 에서 이제 거물로 자리 잡는다. 그의 감독은 그에게 패널티킥을 전담시켰다. 은퇴할 때까지 양쪽 발을 모두 쓸 줄 아는 이 천부적인 공격수는 49차례의 패널티킥을 시도해 모두 성공시켰다.

아, 물론 정말 모두는 아니다. 단 한개의 패널티킥을, 국제적으로 무명의 골키퍼인 마크 크로슬리 Mark Crossley가 선방하는데 성공했다. 크로슬리가 공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자 경기장은 난리가 났었고, 르 티시어는 나중에 씩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홀쭉이는 섬나라 축구팬들의 숨통을 답답하게 만들곤 했는데, 그의 경기 스타일이 마치 당장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는 사람처럼 그라운드 위를 설렁설렁 다니는 것으로 보여질 정도로 도발적이고 또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그의 성의없어 보이는 경기스타일을 비난했고 그가 영국 축구장위의 다른 파워플레이어들처럼 뛰고 헐떡거리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Le Tiss«는 이같은 비난에 골로 응답했다. 그는 리그에서 162골을 넣었으며 그밖의 기타 다른 컵대회에서 총 47골을 성공시켰다.



여기에 그의 천재적인, 어떤 이성적인 설명도 불가능한, 혀를 내두르는 드리블을 추가로 넣어야 하겠다. 그는 »Mighty Mouse« 케빈 키건처럼 빠르지 않았고, 프랑스의 지단처럼 부드럽지도 않았으며, 전성기의 호날도처럼 예술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팬들이 불렀던 것처럼 »Le God« 바로 '신'이었다. 그가 또다시 환상적인 골들을 성공시키면 팬들은 그의 발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그는 자신의 두 발을 영리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엉덩이를 약간 씰룩거리기만 하면 되었고, 큰 덩치의 영국수비수들을 마치 상품설명회에 나온 구경꾼들로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속임수만 필요했을 뿐이다. 그의 인상적인 지그재그 질주는 종종 르 티시어만의 놀라운 슛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가 찬 공은 공중에서 느리게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완벽한 커브를 그리며 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가장 멋진 골들은 이미 각종 인터넷 포탈이나 동영상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 골들을 묘사하는 것은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멋지고 독창적인 작품을 단어들과 문장들로 가두려는 어이없는 시도일 것이다. 그의 골들을 보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다. 1995/96 시즌 그는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40미터짜리의 로빙골을 성공시켰는데, 이 골은 »Goal of the season« '이번 시즌의 골'로 선정되었다. 이 »Saints«의 공격수는 이제 »the Dell« 의 사람들 것만이 아닌, 잉글랜드에서 가장 흥분되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94년 르 티시어는 처음으로 »Three Lions« 의 유니폼을 입게 되지만 대표팀의 책임을 지고 있는 감독 테리 배나블스 Terry Vanables와 글렌 호들 Glenn Hoddle 은 »Le Tiss«의 능력에 큰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그의 국제적인 캐리어의 마지막이었던 1998년까지 르 티시어는 고작 8 경기의 A매치에서 뛰었을 뿐이다. 이는 농담이라도 심한 농담이다.

배나블스의 후임자인 호들은, »Le God«이 대표팀 소집 직전에 있었던 러시아와의 B팀끼리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성공시키고 2번이나 골대를 맞추는 맹활약을 했음에도, 그를 1998년 월드컵에 참가할 선수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이는 영국 축구의 오점이 되었다. 당시 이 경기를 직접 관전하지 못한 호들은 르 티시어를 30명의 예비 명단에조차 포함시키지 않았다. 영국의 축구팬들은 들끓어 올랐고 여기에 잉글랜드 대표팀은 프랑스에서 모두의 예상처럼 실패하고 말았다. 당사자 스스로는 이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했지만 이와 관련해 나중에 그는 후회하듯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이탈리아나 프랑스 대표팀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좀 더 많은 경기에서 뛰었을 것이다."

»He gets the ball, he takes the piss! Matt Matt Le Tiss!«


그러나 클럽 차원에서 르 티시어는 여전히 여느 팀에게나 탐 나는 예외적인 능력의 선수였다. 90년대 중반 토튼햄으로의 이적 시도가 »Spurs«의 재정 문제로 수포로 돌아갔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C 첼시가 그를 영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모두 헛수고. »Le Tiss«는 사우스햄튼에 충실했고, 이에 팀은 그를 팀의 아이콘으로 만들며 화답했다. 첼시의 전 매니저인 매튜 하딩 Matthew Harding 은 나중에 이런 주장을 했다. 만약 자신이 르 티시어를 첼시에 이적시켰다면 당시 클럽이 가지고 있던 이적료 기록을 깼을 것이라고. 하지만 »Saints«는 그들의 '신'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있었으며 그들의 아이돌을 그에 어울리는 구호로 찬양했다. »Le Tiss! Le Tiss! Matt Matt Le Tiss! He gets the ball, he takes the piss! Matt Matt Le Tiss!«

그의 경력 말기에 심각한 부상들이 그를 점점 더 자주 벤치에 머물러 있게 만들었으나 그는 자신의 팀을 위해 2001/02시즌 직후 은퇴때까지 통산 540번의 경기에 나섰다.

2001년 5월 19일 전통의 »The Dell« 의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장 바깥에서 몸을 풀던, 이제 벌써 32살의 르 티시어는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짧은 스프린트로 피치에 들어갔다. 스코어는 2:2. 런던에서 온 승리 후보팀인 아스털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르 티시어가 경기를 결정했다. 패널티 마크 근처에 서있는 그에게 공이 날아왔다. »Le Tiss« 는 머리를 세운 채 눈깜짝할 사이에 몸을 돌리며 왼쪽 발로 공을 세게 찼고 놀라며 서있는 옌스 레만 앞에서 골을 성공시킨다. 팬들의 달링이 득점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스널이 이 경기 이후 1년동안 단 한번의 경기에서도 패하지 않는 놀라운 신기록을 세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매튜 르 티시어가 그의 마지막 골을 넣은 것이다.

2002년 3월 »Le God«은 그의 고별 경기를 가져다. 3만명의 팬들이 사운스햄튼과 잉글랜드 올스타와의 경기를 보기위해 »The Dell«로 몰려들었다. 맷의 어린 아들이 두어개의 골을 넣는데 성공하자 팬들은 모두 외쳤다. »Sign him up!« '쟤랑 계약해!'라고. 그러나 이제는 스카이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는, 한때 국가대표 공격수였던 그의 후임자를 찾기 위해 »Saints«의 팬들은 좀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 신이 매일 오는 법은 아니니 말이다.

원문보기
Autor: 3 Ecken Ein Elfer, 11Freunde
번역: s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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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튜브에서 발견하고 완전히 반해 버린 선수입니다.
그에 대한 좋은 기사를 독일의 축구잡지인 11Freunde에서 발견해 많이 모자라지만 번역해 보았습니다.


유튜브에 널려 있는 그의 동영상중 하나입니다. 화질이 11 Freunde에서 소개된 위의 두 영상보다 좋아 소개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득점 장면이 이 글에서 등장하는 아스널과의 경기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