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자르기

Leben in Deutschland 2009. 5. 7. 23:58 posted by srv

작년 여름이 지나고 늦가을 어느 무렵인가부터 저희 아이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를 자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아이는 '기타치는 형들'처럼 머리가 길어지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어차피 날씨도 쌀쌀해지니 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던 것도 또다른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앞머리가 너무 길어지면 아내가 조금씩 다듬어주긴 했지만 옆과 뒷머리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겨울내내 아이는 머리를 길렀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많이 길어지니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동네 할아버니, 할머니들뿐 아니라 아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자애죠?"라고 물어보는 것은 그나마 약과였습니다. 관리가 안되고 점점 길어지는 머리덕분에 잘 씻겨놔도 뭔가 정리가 안된 기분이 드는데다 수영장이라도 가면 아이 머리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완강하게 머리 깎기를 거부하던 아이가 어느 날 약속을 했습니다.
날이 따뜻해져 반팔옷을 입게 되면 머리를 깎기로..
그리고 저희 부부는 그때부터 따뜻한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날이 좀 따뜻해지니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귀를 완전히 덮은 머리에 주목해주세요.

나름대로 표정연기를 펼치고 있습니다만... 헤어스타일이 안습;;;입니다.
갑자기 80년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전영록이 떠오르는군요.

열심히 길렀지만 뒷머리의 길이는 이정도가 한계더군요.

그리고 4월 어느 날....
날씨가 갑자기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기온이 쑥쑥 올라가버려 반팔옷을 입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날씨가 며칠 계속되자 저희는 아이에게 드디어 말을 꺼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반팔옷 입을 수 있으니 머리도 깎자."
아이는 착하게도 군말없이 깎겠다고 하더군요. 하긴 날이 더워지니 긴 머리가 이젠 답답하기도 했을 껍니다.

지금까지는 늘 엄마의 손에 깎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머리를 깎아주시겠다는 분의 집에 갔습니다.
"이제 긴 머리와는 이별이라니... 떨려요.."

'긴 머리를 이용해 얼굴크기를 가리던 트릭은 이제 써먹을 수 없겠군...'

그래도 반항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얌전히 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서워했던 '기계'로 머리를 깎았는데도 말입니다.


"여보세요? 할머니, 드디어 머리 깎았어요."
한국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이의 머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그동안 보느라 답답했다면서... ㅠ.ㅠ

머리가 짧아지니 이젠 좀 더 개구장이같은 모습입니다.
부활절이라고 받은 달걀모양의 초컬릿을 들고 찰칵!
오랜만에 아이의 귀를 볼 수 있게 되어 반갑습니다.


머리를 깎으니 좋은 일도 생깁니다.

유치원에서 아이와 같은 그룹(한 그룹은 10명에서 12명정도. 모두 4그룹이 있습니다.)에 꽤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여자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역시 같은 그룹의 작지만 꽤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와만 놉니다. (그래서 이 남자아이는 남자아이들 그룹에 잘 끼지 못하더군요.)
이쁜 여자에 무한히 약한 저희 아이는 속으로 이 여자아이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나는 머리가 긴 남자는 정말 싫어."라고 해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답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니 이 여자아이가 함께 놀아주기 시작했답니다.
유치원 2층에서 쿠션으로 배를 만들어 놓고 저희아이와 둘이서 놀고 있는데, 여자아이의 단짝 남자친구가 올라와 그러더랍니다. "이 배는 우리 둘의 배야!"
그랬더니 여자아이가 "아니야! 이제 이 배는 우리 셋의 배야!"라고 했답니다.

저희 아이는 머리를 깎으니 세상이 자기를 보는 눈이 이렇게 달라졌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머리 기르겠다는 말은 들을 일이 없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