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다음 휴가는 꼭 비행기!입니다. 라고 굳게 다짐을 했기에 이번 여름 휴가는 소위 패키지라고 말하는 휴가 상품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인터넷 여행사 사이트들을 전전하며 우리의 예산에 맞는 상품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거의 전적으로 아내가 맡았는데, 나중에는 정말 눈이 빠질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ㅠ.ㅠ
원래 생각했던 휴가는 역시 바다!였고 따라서 스페인, 이탈리아 등이 주타겟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친한 친구가 있는 런던도 잠시 고려되었으나 휴가라는 느낌이 안날 것 같아 제외했고, 작년에 갔던 크로아티아는 교통이 불편하고 의외로 적정 가격대의 상품을 찾지 못해 일찌감치 대상에서 제외되었죠. 그리스, 터키, 북아프리카 등 역시 가격대가 만만찮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1. 눈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무릅쓰고 열심히 물색을 하던 아내는 나중에는 여행 상품 검색의 전문가가 다 되어 버렸습니다. 독일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는 곳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마요르카섬과 이탈리아의 아드리아 연안이 최종 목표가 되었습니다. 매 끼마다 닥치는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아 아침과 저녁을 포함하는 상품으로 말이죠. 그리고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몹시 들뜬 목소리로) 드디어 찾았어!" / "뭘?" / "자세한 것은 집에 오면 얘기해줄께. 지난 주보다 가격이 팍팍 떨어졌더라구. 나한테 칭찬 많이 해줘야 할꺼야." / "OK. 어디 봅시다."
그리고 집에 가니 아내의 얼굴이 밝습니다. 제게 마요르카섬의 패키지 상품을 보여주며 호텔의 위치가 공항에서 멀지 않고 가격도 적정하며 무엇보다 예약이 가능하다며 당장 여기로 하자고 방방 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말 없이 아내에게 오늘자 신문을 건네주었습니다. 신문의 헤드라인은...
"스페인 마요르카, 제 2차 폭탄 테러"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이번 여름에는 우리와 마요르카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입니다. 물론 테러의 위험도가 낮다고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찝찝한 마음이 들어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죠.

그래서 이번 휴가는 그냥 멀지 않은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래도 바다를 봐야겠다며 아내는 북해 Nordsee와 발틱해 Ostsee를 뒤지기 시작하더군요. 어차피 패키지는 없을테니 콘도미니엄 스타일의 숙소를 알아봤습니다만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무엇보다 비어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쥐어 싸며 고민하고 있는 아내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그냥 뮌헨이나 가자." / "싫어. 그게 무슨 휴가야?" / "어때서 그래? 아이랑 독일 박물관 Das Deutsches Museum도 가고 피나코텍 Pinakothek 순회도 하고..." / "당신한테나 좋지.. 난 싫어."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어디를 찾는 것도 귀찮았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생각나는 곳이 있더군요.

"우리 산에 가는 것은 어때? 독일쪽 알프스인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 Garmisch-Partenkirchen.. 당신은 싫다고 하지만 얼마 전에 아무개가 갔다 왔는데 정말 좋았데. 아이를 데리고 올라갈 수도 있고.." / "아악! 여름에 산이 뭐야! 정말 싫다고!" / "나도 그걸 알긴 하지만 지금 다른 방안이 없잖아. 독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추크슈피체 Zugspitze에도 올라가고 빙하 Gletscher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 "......"

결국 너무도 지친 아내는 제게 설득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곳의 멋진 사진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허용 예산 안에서 교통과 숙식을 해결할 방법을 쉽게 찾았기 때문이죠. 바다를 가고 싶어하던 아이도 다행히 쉽게 설득이 되었습니다. 물론 찜찜하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요.
그래서 이번 여름 휴가는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 여행이 되었습니다. 숙소는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의 유스호스텔. 가족방을 내준다는 제안과 저녁을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어 가르미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임에도 이곳으로 잡았습니다. 예약할 때는 전혀 몰랐지만 이곳으로 숙소를 정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

2. 떠나기 전날 집에 들어와 보니 가져가야 할 짐이라며 아내가 옷들을 잔뜩 쌓아놨더군요. 아무래도 고지대 -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의 해발은 약 700m, 추크슈피체의 해발은 약 3000m - 에 산 속이라 기온이 낮을 것 같아 두꺼운 옷을 가지고 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여행짐을 체크하고 최종적으로 싸는 일은 전적으로 제 일이라 결국 저만 늦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여행 트렁크가 들기도 힘들만큼 무거웠습니다.

3. 아침 8시 기차라 더 일찍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다행히 날씨도 화창하고 아이의 컨디션도 좋아 보였습니다. 계획에 차질 없이 기차를 탈 수 있었고, ICE의 편안한 좌석에 앉아 창 밖을 보니 그제서야 어디론가 떠난다는 느낌이 났습니다. 아이는 기차 안에서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중 오디오북을 찾아 엄마와 열심히 들었고 저는 약간은 부족한 잠을 채우려 이른 시간임에도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꼭 사진을 찍어야 하나요?'



뮌헨에 도착해 기차를 갈아타니 에어컨도 없고 좌석도 불편한 기차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달라지는 창 밖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여행에서 제일 즐거운 부분이 바로 목적지를 향해 갈 때가 아닌가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4. 목적지에 도착하니 약간 이른 점심 시간입니다. 우선은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 역에서 좀 먼 거리에 있더군요. - 를 찾아 30kg은 족히 넘을 트렁크를 질질 끌며 가르미쉬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정보들을 찾아놓긴 했지만 현지에서 얻는 이야기는 좀 다를까 싶어 물어봤던 것이죠. 그리고는 점심을 먹을만한 곳을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짐의 무게도 무게지만 뭔가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되는 곳이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시작점이었던 역으로 돌아와 '버거왕'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ㅠ.ㅠ 그리고 나니 아이가 피곤함을 호소합니다. 잠도 늦게 잤는데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나오려니 피곤했겠죠. 그래서 유스호스텔의 정해진 체크인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지만 일단 숙소로 가서 쉬어도 그 앞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한시간에 한두대꼴로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며 음료수와 만일을 대비한 간식 거리를 사놨습니다.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은 독일 남동쪽의 작은 마을로 오스트리아 국경과 매우 가까운 곳입니다. 알프스 산맥의 높은 산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며 해발 2962m로 독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추크슈피체 Zugspitze가 위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미 고대 로마시대의 가도 휴게소(Partnanum)이 있던 곳으로 나치 시절인 1936년에는 동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2018년에 있을 동계 올림픽 유치에 나서고 있으며 2011년에는 알파인 스키 세계 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소위 4 Schanzentournier라고 부르는 매년 연말/연초에 독일/오스트리아의 4군데에서 연속으로 열리는 스키 점프 대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약 15분정도 버스를 타고 가니 산과 산 사이의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개울이 흐르는 바로 옆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습니다. 방금 전 시내에서 걸을 때만 해도 피곤하다면 미역처럼 늘어지던 아이가 넓은 풀밭을 보더니 갑자기 힘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저는 '아.. 저 촌놈. 시골에 가야 힘이 나냐..'며 자연친화적인(?) 아이를 지켜봤습니다. 시간이 안되어 리셉션에 아무도 없었지만 사무실에서 누가 나오더니 친절하게 체크인 수속을 밟아줍니다. 로비에나 앉아서 기다리려 했건만 오히려 방에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스호스텔답게 나무로 된 이층침대와 옷장에 한쪽 구석에는 세면기가 있는 간촐한 방이었지만 시설들도 낡지 않았고 무엇보다 매우 깨끗했습니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 입고 침대도 정리하고 한숨 돌리고 밖으로 나와 아내와 맥주를 한잔 마셨습니다. 맥주는 리셉션에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이날은 몰랐지만 이후 매일 저녁마다 아내와 맥주를 한두잔씩 마시게 됩니다. :-)
밖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한쪽에서는 개울 소리가 들리고 너무도 맑고 청량한 공기에 멀리 우뚝 솟은 높은 산들의 자태도 보이니 술맛이 절로 나더군요. :-)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
잘해야 학생 식당 수준의 파스타가 다 일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샐러드 뷔페도 제대로 갖춰져 있고 음식의 맛과 질이 뛰어나 정말 세 식구가 열심히 먹었습니다. 물이나 쥬스 등의 음료도 마실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디저트까지 잘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불러 몸을 좀 움직여야겠더군요. 그래서 개울을 따라 걸자며 산책을 나왔습니다. 맑은 개울을 보니 소시적 시골에서 좀 놀아보신 아내가 물가에서 놀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더군요. 바닥이 투명하게 보이는 개울을 따라 좀 걷다보니 역시 적당한 장소가 등장합니다.

정말 차가웠던 개울물


호기있게 양말까지 벗고 개울물에 발을 넣었지만.....
도저히 서있기도 힘들정도로 물이 차갑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는 용케 개울을 건넙니다.

돌도 던져 주시고..

아이는 작은 자갈들을 물에 던져보기도 하고 예쁜 색깔의 돌을 찾기도 하며 잘 놉니다.
정녕 우리 아이는 시골 아이가 적성에 맞는 것일까요?

그렇게 놀다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그만 돌아가기로 하고 일어섰습니다.

서편제?

아내와 아이는 마치 서편제의 한장면이 떠오르게 만드는 풍경을 만들며 걸어 갑니다. 멀리 보이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들은 과연 우리가 산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내일은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일기예보를 보니 하루종일 비가 예상된다고 합니다.